건조하고 싸늘한 찬 바람이 지나고 바야흐로 촉촉한 풀잎이 땅 위로 솟아나는 계절이었다. 일본이 인정한, 그러나 일반인에게는 정체를 숨겨야 하는 히라사카기관의 닌자로서 오늘도 겨우 퇴근한 미도 이사미는 무심코 우편함을 열어보다가 깨닫고야 말았다. 바야흐로 봄이었다. 그리고 봄이란...
“브로슈어네...”
반투명한 비닐을 뜯고 브로슈어를 뜯자 거대한 유리 천장 아래 저마다 아름다운 빛깔을 뽐내는 나무와 식물들의 사진이 잔뜩 등장했다. 올해 공식 시즌을 맞아 개관하는 식물원 내부의 사진들이었다. 피곤에 찌들어있던 눈동자가 활기를 대찾았다.
식물원!
집에서 키우지 못하는 다채로운 나무와 식물들! 다습하지만 싱그러운 공기! 오로지 식물원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인테리어들과 느릿하게 걸으며 내부를 만끽하는 사람들까지, 싫은 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곳이었다. 봄이야말로 이사미가 1년 중 가장 고대하던 시기였다. 새로운 식물원이 개관하거나, 기존의 식물원이 신년의 시즌을 맞이해 기념 삼아 새로운 종을 선호인다든지 하는, 즐거운 이벤트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사미는 브로슈어를 안고 가뿐한 걸음걸이로 집 안에 들어왔다. 도어락의 기계음과 함께 현관문이 닫히고, 불을 켜자 어둠에 잠긴 집 내부가 환해졌다. 1층에다가 여럿이 살기엔 작은 집이었지만 혼자 거주하는 이사미에게는 딱 알맞은 그의 보금자리였다. 이사미가 소파에 브로슈어를 놔두고 실내복으로 갈아입는 사이, 베란다에서 두 개의 작은 빛이 서서히 움직이다가 거실 쪽으로 빠져나왔다.
“앗.”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이사미가 거실의 소파 쪽에 자리 잡은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몸을 둥글게 만 뱀이었다. 얼핏 보면 직사각형의 도형을 길쭉하게 연결해서 만든 모조 뱀이었지만 장난감 같은 귀여운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별일 없었나요..”
뱀의 머리가 살짝 위를 향하며 움직였다. 두 개의 노란빛이 깜빡였다. “으음.” 기계음이 섞여 있는 대답이 들려왔다. 미도 이사미외에 다른 평범한 사람이 이 장소에 있었다면 그 목소리에 기겁했을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기계에서는 절대 나올 리 없는 음성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이사미는 편안하게 작은 뱀, 동신과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처음에나 신적인 존재가 집에 머무른다는 것에 놀랐지, 매일 일상을 같이 지내다보면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날이 좋아 어린이들이 바깥에서 잘 뛰어놀더군.”
“그렇군요..”
이사미의 집은 1층인 데다 바로 앞에 놀이터가 있었다. 지금은 작은 기계 뱀의 몸에 봉인되어 있어도, 명색이 어린이를 수호하는 신이 보초를 서며 돌보기에는 아주 좋은 터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왼쪽에 있는 식물의 흙이 건조한 거 같더군. 그 외에는 별일 없네.”
“아~~ 슬슬 물 줄 때가 되었죠. 감사합니다..”
동신이 친절하게 일러준 대로, 이사미는 스프레이에 물을 채워 베란다에 나갔다. 오늘도 파릇파릇한 식물들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흙이 마른 화분에 물을 채워주고, 이파리에 수분을 보충해주자 순식간에 저녁 시간이 지나갔다.
“아. 맞다.”
브로슈어를 확인하고 가장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일이 있었는데, 무심코 잊고 말았다. 이사미는 익숙한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톡톡 튀는 귀여운 통화 연결음이 잠시 이어지다가 발랄한 음성이 들렸다.
“여보세요? 선배군~?”
물결치는 목소리 외에도 식기가 부딪치거나 여러 사람들이 넓은 장소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 등이 같이 들려왔다.
“선배군입니다. 핫쨩. 지금 저녁 먹어?”
“친구들이랑 카레~”
“카레 부럽다. 나중에 통화할까 그럼?”
까르르 웃는 소리가 건너편에서 울렸다. 하즈키는 아니고, 아무래도 레나나 다른 친구가 있는 것 같았다. 잠깐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하던 하즈키가 대답했다.
“지금 해도 괜찮다는 거네~”
“그럼 사양 않고.”
이사미는 어깨로 스마트폰을 받친 채 브로슈어를 펼쳤다. 끄트머리를 살짝 접어둔 페이지가 금방 나왔다. 페이지에는 <AAA 식물원 개장!> 이라고 큼지막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핫쨩, 다음 주 주말에 식물원 갈래?”
“식물원~?”
“엄청나게 커다란...”
그야말로 거대한 몬스테라의 종류가 페이지 전체에 찍혀 있었다. 핑크색 점박이가 이파리에 점점이 물들어있었다. 쉽게 볼 수 없는 색채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뛰는 건 색보다도 크기였다. 이렇게 커다랗게 자라는 몬스테라 종류는 본 적이 없었다. 하즈키한테 보여주면 신기해할 것 같았다.
“...몬 군이 있는 식물원인데.”
“엄청나게 커다란 몬-군?”
하즈키와 이사미 말고는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할 애칭이었다. 게다가 ‘엄청나게 커다란’ 이라는 설명은 정보 값이 크다는 것 말고는 없는 저렴한 수식어였다.
“응. 그거.”
“우와~~ 갈래~”
그러나 그 저렴한 수식어에 오히려 하즈키는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가벼운 승낙에 이사미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즈키는 누가 뭐래도 식물원을 같이 만끽할 수 있는 좋은 친구였다.
“오. 좋아. 답례로 선배군이 아이스크림 사줄게. 녹차 아이스크림을 판다고 하네.”
천진한 감탄사가 길게 들려왔다. 이사미는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만날 시간을 정했다. 하즈키는 시원스럽게 시간을 받아들였다.
“식물원 가서 녹차 아이스크림도 먹고 찹쌀떡도 먹는 거네~?”
“그러자. 그런데 나 거기 근처에 맛있는 찹쌀떡을 파는 집이 있는지는 모르는데...”
“하즈키가 알아~”
하즈키... 찹쌀떡 가게 관련해선 박사구나. 무심코 그렇게 말하자 뿌듯해하는 듯한 웃음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이사미는 간질간질한 웃음소리를 감상하며 브로슈어 옆에 날짜와 시간을 작게 적어두었다.
“그럼 다음 주 토요일에 식물원 가는 거다?”
“응. 선배군은 저녁 먹었어~?”
“아직.”
“선배군도 카레~ 먹는 거네?”
“그러려고. 카레 맛있게 드세요, 핫쨩.”
“네에~~”
낭랑한 대답을 끝으로 저녁의 전화가 끊어졌다. 이사미는 뿌듯한 얼굴로 스케쥴러에도 표시를 해두었다. 식물원 탐방은 이사미의 즐거움 중 하나였지만, 그래도 혼자 감상하기에는 아쉬울 때가 많았다. 그런 이사미에게 같은 템포로 식물원을 걸어주면서, 특이하거나 처음 보는 식물을 볼 때마다 나름대로의 감상을 들려주는 하즈키는 좋은 친구이자 포기할 수 없는 식물원 탐방 동료였다.
“아~~ 기대된다.”
어린애처럼 기대하는 모습을 동신이 얌전히 지켜보았다.
“식물원에 가는 게로군.”
이사미가 천 소파 위에 자리를 잡은 조그마한 뱀에게 시선을 던졌다.
“네에. 동신 님도 모시고 갈까요?”
“괜찮네. 둘이 즐겁게 즐기고 오면 좋은 일이지.”
“식물원 구경하고 핫쨩 데려올게요. 감상도 들으면 즐거우니까요.”
“고맙네.”
“자 그럼...”
슬슬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이사미는 브로슈어를 꼭 안고 소파에 기댄 채 저녁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며 30분을 소비했다. 동신이 저녁 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을 넌지시 던진 덕에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그날 이사미의 저녁은 카레였다. 만능 냉동 야채 믹스에 카레 가루를 넣어 끓인 거였지만, 아무튼 카레였다.
식탁에 앉아 한 입 먹으려는데 낭랑한 벨 소리가 짧게 울렸다. 스마트폰을 열어보자 음식의 사진이 메신저에 올라와 있었다.
-나중에 선배군도 같이 먹는 거네?
조명을 받아 먹음직스럽게 찍힌 카레의 사진이었다.
이사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느리게 문자를 송신했다.
-꼭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