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0 챌린지
당신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겁니다.
저는 그 때 신 따위는 믿지 않는, 철저한 이성과 논리만이 사회를 한 차례 더 나은 차원으로 도약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정확히는 그런 생각에 도취되어있는 재수 없는 인간이었죠. 저의 도취는 오래간 이어졌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부를 획득할 수 있는 좋은 타이밍에 사업을 시작하셨고, 사업의 호황기에 제가 태어났지요. 3층짜리 오래된 빅토리안 양식의 대저택이 제 유년기의 배경이었어요. 어린 제가 작은 침대에서 일어나면 깨끗한 옷을 입은 유모가 저를 식당으로 안내해주곤 했죠. 집 안은 온통 대리석이었으나 어린 제가 혹여 넘어져 다칠까봐 아주 부드러운 러그로 덮어버렸어요. 제가 어떤 녀석으로 자라났을지 이제 짐작이 좀 되시겠군요.
부드럽고, 안온하고, 강력한 그림자 아래서 저는 자라났습니다. 부모님은 제 두뇌가 잘 돌아간다는 사실을 일찍 눈치 채셨고, 우아하게 기뻐하셨으며, 좋은 책과 좋은 친구들로 화답하셨어요. 그 덕에 저는 부드러운 미소로 상대를 방심하게 한 뒤 은근슬쩍 관계의 고지를 차지하는 데에 능숙해졌죠. 모두 저를 좋아했어요. 저와의 불꽃 튀는 논쟁에서 패배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자기 집에 가지 않겠느냐고 권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저는 그 권유를 거절하며 우월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 은근한 우월감, 이성과 논리에의 도취는 당연스럽게도 대학교와 대학원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곧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교의 최연소 정식 교수로 임명되었지요.
세상이 전부 제 아래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그녀를 소개 받았습니다. 오랜 친구의 주선이었죠. 그녀가 ‘다르다’는 것을 너는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수수께끼의 말과 함께요. 저는 속으로 그 말을 비웃었습니다. 신비주의 문학이라도 잔뜩 읽은 것 같은 태도하며... 친구의 시선이 허공을 떠도는게, 마약에 잔뜩 취한 것 같았거든요. 그녀를 만난 후 친구에게 정신 차리라고 차가운 말을 쏘아붙일 작정이었습니다.
그녀는 대학로가 한 눈에 보이는 건물의 2층 가정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낡은 철제 문 앞에 선 순간 저는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습니다. 그건... 분명... 두려움이었어요.
저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바람이 불어왔었죠. 창가에 걸터 앉은 여자가 있었습니다. 작은 체구에 발목까지 아이보리색 드레스로 가려져 있었어요. 가냘픈 손이 창틀에 얹어져 있었고, 풍성한 갈색 곱슬머리가 어깨까지 덮었죠. 햇빛이 그녀의 옆모습을 비추었는데, 피부가 환하게 빛이 났어요. 그녀가 손님이 왔다는 걸 눈치챘는지 느리게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머리카락이 물결치며 느리게 흔들렸습니다. 다음 순간,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저를 꿰뚫었습니다. 그 눈동자에 실린 빛은... 아주 명확했어요. 제 영혼 깊숙한 곳까지 응시하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가 온몸으로 느껴졌어요.
그리고... 그리고, 그녀는 웃었습니다.
그 미소에 이제까지 쌓아왔던 저라는 인간의 모든 게 부서져서 사라졌습니다. 저는 어떤 말도 하기 전에 그녀에게 패배했습니다. 어떤 언어도 그녀에게 승복하고자 하는 저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어느새 그녀의 발밑에 무릎 꿇고 있었습니다.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이더니 뺨을 타고 흘러내리더군요. 작은 빛이 우리 사이에 내리쬐었습니다. 얇은 두 팔이 저의 어깨를 부드럽게 껴안았고, 저는 그대로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렇게 저는 끝났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녀에게 영혼까지 복속된 종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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