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은 문제없이 흘러갔다. 흐릿한 날이던 화창한 날이던, 헤로드 재단이 임무를 맡기면 롤랑은 안제와 함께 차에 올랐다. 라르바의 농간으로 출구 없는 미로처럼 변한 어느 지하철 입구를 헤매기도 했고, 성가신 볼타를 처치하느라 밤을 새우기도 했지만 그들은 별 탈 없이 임무를 소화해냈다. 강력하고, 일 처리도 확실한 가디언과 로드는 그런 법이다. 놀라울 정도로 평탄한 나날이 지나갔다.
그래서 예측 못한 폭풍우가 찾아왔을 때 연구 팀장은 침착했다. 재앙이란 어느날 갑자기 들이닥치는 법이니까.
제발로 걸어온 가디언은 얌전히 안정실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무서울 정도로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안제의 가디언, 롤랑은 고요하게 말했다. 자신의 정신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노라고.
“저희가 곧 방법을 찾을 겁니다. 침착하게...”
가디언은 팀장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방법은 없습니다.”
가라앉은 목소리는 침착하고 단호했다.
“그런 건 없을 겁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아마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겠지요.”
그리고 연구팀장은 그 목소리에서 소름 끼치는 무언가를 읽었다.
“롤랑 님. 방법이 없다면 저희가 만들어낼 겁니다.. 저희가 못한다면 안제 님이 해내실 거고요.”
가디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렸다. 안정실에 서서, 환자복으로 환복한 금발의 미남자. 평소대로라면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일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기이하게 빛을 발했다. 그것은 마치, 한 가지 결말만을 쫓는 질주마의 시선과 같았다. 양옆을 볼 수 없도록 가려진 채 파멸을 좇는… 광인의 눈동자.
발작은 그날 밤부터 시작되었다.
모든 일에는 수순이라는 게 있다. 제삼자가 보았을 때는 어떤 조짐 없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현상도 세세히 관찰해보면 특정한 인과가 당연히 존재했다. 롤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조용하고도 잔인한 폭풍우가 아무 이유 없이 그를 찾아왔을 리가 없었다.
롤랑은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그는 사랑에 실패해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소용돌이에 갇힌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된 것이다. 또다시... 사랑때문에.
그는 부서질세라 조심히 만지작거리던 머리카락을 손아귀에서 놓았다. 어둠 속에서 머리카락이 은색실처럼 부스스 흩어졌다. 머리카락의 주인은 인기척에 잠이 깼다. 옆으로 누웠던 어깨가 돌아가며 얼굴이 드러났다. 한밤중의 침실, 색소 옅은 눈동자는 유독 밝았다. 잠에 든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제가 깨웠군요."
"롤랑."
안제는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였다.
"연구팀이 당신을 보내줬어? 안정실에 며칠은 있어야 한다고 했잖아."
"그랬지요."
"당신이 원한다기에 허락한 거였는데."
한낮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주인의 얼굴에 마뜩잖은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롤랑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최대한 아프지 않게, 조심스럽게, 어깨를 붙잡은 손은 주인이 다시 침대에 눕도록 인도했다.
"그냥 왔습니다."
"왜?"
"거기에 있었더니 안제 님이 보고 싶어 졌습니다."
변덕스러운 말이었다.
주인은 자신의 어깨를 감싼 손바닥을 떼어냈다. 어둠 속이지만 알 수 있었다. 두껍고 굳은살 박인 손바닥 지문 사이사이에 고운 먼지와 작은 알갱이가 박혀있었다. 뭔가 박살내고 왔다. 아마 안정실에 있는 물건이거나... 안정실 자체일 수도 있었다. 안제는 종의 손을 쥔 채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 잠긴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안제의 눈에도 어딘가 어긋나 있는 게 확실히 보이는 미소였다.
"재단 가기 싫으면 여기 있어."
단조로운 어조에 주인에게 잡힌 손바닥이 움찔거렸다. 돌아오는 대답 없이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그 얼굴이 웃는지 우는지 안제의 시선에는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손바닥을 쥔 채 다시 누웠다. 눈을 감자 마치 흐느끼듯 잘게 떨리는 마력의 파동만이 피부를 타고 전해졌다.
먼곳을 보는 시선이 창 밖을 향했다. 창문 너머는 흐렸고, 잿빛 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롤랑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창문을 슬쩍 열었다. 습하고 답답한 공기가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에 창문은 곧바로 닫혔다.
'어제 일기예보가 어땠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안개라도 낀 듯 흐린 머릿속을 더듬자 잡히는 기억이 있었다. 주인과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아 오렌지를 나눠먹으며 일기 예보를 봤었다....... 그게 며칠전이었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하물며 그때 먹었던 오렌지가 무슨 맛이었는지도.
"롤랑."
막 침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 잠옷 차림의 주인이 침실의 문턱에 어깨를 기댄 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롤랑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입을 벌려 답했다. 안제는 평소와 달리 무엇이 먹고 싶다는 등의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얼굴을 길게 들여다보다가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수도꼭지 잠궈."
그제야 그는 끊임없이 들리는 물소리를 눈치챘다.
"...아."
튼튼한 팔뚝이 차가운 물에 잠겨있었다. 싱크대에서 물이 넘쳐 아래를 타고 바닥으로 줄줄 흐르고 있었다. 발바닥은 축축했고 주방은 반쯤 바닥이 젖어 물바다나 다름 없었다.
수도꼭지를 누르자 물소리가 멎었다. 기묘한 침묵이 부엌에 감돌았다.
"당신 확실히 이상해졌어."
질타하는 것도, 안타까워하는 것도 아닌 침착한 어조였다.
"왜 그러는 거야."
롤랑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이상해졌다. 그 말이 불러오는 기억들이 있었다. 그래, 어제 그는 일기예보 따위를 볼 시간이 없었다. 그는 재단을 찾았고, 연구팀장과 일련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리고......
"이상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입꼬리를 비틀어 미소를 지었다. 롤랑도 안제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이상해졌다. 다만 그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을 종은 알고 주인은 몰랐다.
"잠시 생각에 몰두해서 그랬습니다. 부엌은 바로 치우겠습니다."
롤랑은 안제에게 자신의 이상을 숨기고 싶었다. 그의 머릿속을 좀먹어 들어가는 이 감정. 기억과 영혼을 갉아먹어 구멍을 내고 가장자리부터 썩어들어가는 이 감각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까지는 버티고 싶었다. 안제가 그를 보는 시선이 차가워지고, 종극에는 고개를 돌릴 그 순간까지는......
ㅡ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면, 뭔데?
안제 마이어는 분명히 그를 원했다. 여덟 살 짜리 어린아이가 목숨까지 던져가며 그를 소환했다는 일화를 들은 몇몇 사람은 무서울 정도의 무모함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하지만 롤랑은, 그게 좋았다. 그 정도로 안제가 그를 원했다는 사실이 좋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가슴 벅차는 일이다. 그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안제와 롤랑은 오래도록 같이 있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안제를 잘 안다고 롤랑은 자신할 수 있었다. 그는 안제의 성장 과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았다. 주인이 어떻게 사고하는지도 조금이나마 추측할 수 있었다. 그의 주군은 새로운 것을 좋아했다. 보지 못한 경치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출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주군이 웃지 않는다고 했지만, 주군은 누구보다 조용히 완벽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안제는 그에게 다시 한번 생을 선사한 주군이었다. 그리고 롤랑은 언제까지고, 무너지지 않고, 그런 주군의 곁을 지켜야하는 종이었다. 그의 모든 것을 주인의 손에 맡기리라 맹세했다. 동시에 누구에게도 부정당하지 못할 완전무결한 승리를 손에 안겨드리리라 다짐했다.
안타깝게도 그 모든 다짐과 맹세는 롤랑의 육신과 정신, 영혼이 온전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또 다시 실수를 했다.
그 아닌 누군가와 안제가 시선을 교환할 때, 다른 곳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을 때, 악수를 거절하지 않을 때, 선물을 받아들며 기대하는 표정을 보였을 때, 다른 로드와 경합하며 즐거움에 뺨이 달아오르던 그의 주군을 볼 때.... 매순간이 롤랑에게는 고통이었다.
마음의 고통을 죽이는 것은 괴로웠다. 그러나 감정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몇 번이고 부정했지만 그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었다. 마음을 활활 불태우고 그를 천국 끝까지 끌어올렸다가 한 순간에 지옥으로 꽂아버리는 그 감정의 실체는. 노래와 시로, 이야기로 고귀하다고 찬사받지만 그에게는 저주나 다름 없는 이 감각은.
사랑이 아닐리가 없었다.
그래서 롤랑은 감히 주인에게 사랑을 말하는 일 따위는 할 수 없었다. 안제가 가장 바라지 않으며 경계하는 상황 중 하나가 롤랑이 사랑에 빠지는 것일 테니까.
롤랑이 안제를 잘 알듯 안제도 롤랑을 잘 알았다. 그의 주인은 이 세상 누구보다 그의 존재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사랑이 결국 어떤 결말을 맞이했고, 그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당연히 알았다.
이 빠진 검은 누구도 쓰지 못한다.
주인은 종을 아꼈다. 누구보다 아꼈다. 하지만.
종이 종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그의 감정이 기억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마음이 새까맣게 그을리고, 종극에 제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되면.
안제를 지킬 수 없게 되면.
그러면 그의 생의 마지막 주인, 안제 마이어는 그의 쓸모가 다했음을 초연히 받아들이고 그를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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