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를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아프다. 몰랐던 사실이었다. 소마는 흰빛을 발하는 화면을 노려보다 휴식을 취할 겸 고개를 돌렸다. 사무실에 난 창밖으로 도심의 야경이 얼핏 보였다. 시간이 오후 9시를 넘어가는데 아직도 불 켜진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현대인들은 다들 이런 식으로 일을 하는 건가? 소마는 말에 박차를 가하고 검과 쿠나이로 피 터지게 싸우지 않으면 하루를 보장받을 수 없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에 비하면 평화롭긴 하지만...
“소마 님.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집중해 주시죠.”
상념은 충직한 참모에 의해 깨졌다. 소마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책상에 서류 뭉치가 두 묶음이나 올라왔다. 소마는 질린 표정으로 서류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분명 아까가 마지막이라고 하지 않았어?”
“결산 보고 관련 업무는 마지막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럼 이 서류들은 뭔데 이렇게 많아?”
엔쥬가 나름대로 쉽게 풀어서 내용을 설명해 줬지만, 익숙하지 않은 서류 업무에 진이 빠진 소마의 귀에 다 들어올 리 없었다. 소마의 주의력이 흐트러지자 엔쥬가 헛기침을 했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소마가 뻔뻔하게 되물었다.
“오늘은 이 서류까지 확인하고 퇴근하시면 되겠다는 이야기 중이었습니다.”
“이걸... 오늘까지.”
소마는 손가락으로 서류의 양을 가늠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9시 15분으로, 내일이 되기까지는 3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이 남았다. 어떻게 봐도 3시간 안에 처리할 수 있는 서류가 아니었다. 소마의 시선이 엔쥬에게 돌아갔다. 유쾌한 눈빛은 전혀 아니었다. 참모는 시선에 실린 소마의 생각을 쉽게 파악하고 입을 열었다.
“서류를 확인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려드릴 테니 금방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파악했다고 해서 ‘오늘은 됐으니 들어가세요.’ 같은 말을 할 리는 없었다. 엔쥬는 회사 운영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고, 돈을 벌려고 만든 회사도 아니고 주군의 의사에 따라 세운 곳인 만큼 설렁설렁 일을 처리해 차후 문제를 만들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스이센 사무소의 분기별 실적을 정리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이번 분기는 사무소가 고용한 인원과 여러 곳에서 받아내어 완료해낸 의뢰의 수가 늘어난 만큼, 처리해야 하는 각종 서류 역시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소마는 현대에서 회사나 단체를 운영하면서 필수로 겪어야 하는 절차나 사정은 잘 몰랐다. 엔쥬에게 설명을 들었지만 왜 협력사나 행정 기관에 이런 서류를 보내야 하는지 다는 이해하지 못했다. 참모가 필요한 절차라고 하니까 서툰 솜씨로나마 겨우 처리해낼 뿐이었다.
“어제도 이러다가 12시 넘어서 퇴근했잖아. 내일도 똑같을 거고.”
“그렇겠죠.”
엔쥬가 태연히 답하자 소마는 폭발하고 말았다.
“뭐가 그렇겠죠야?! 너무한 거 아니야? 2주 내내 이러고 있다고! 저번보다 일이 늘어난 거 같은데 내 착각이냐? 아니지?!”
“진정하세요.”
“진정하게 생겼어?! 차라리 빡센 의뢰를 받고 싶다니까! 몸을 움직이면 개운하기라도 하지, 도대체 이 서류들은 언제 끝나는 거야?!”
소마의 짜증은 금세 가라앉았다. 잠시 울컥했을 뿐, 어쨌건 해야 하는 일이고 미뤄봤자 일 처리만 늦어질 뿐이었다.
엔쥬는 이때다 싶어 가장 윗단에 있던 서류를 펼쳤다. 차분한 목소리가 어떤 내용을 주로 확인해야 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소마가 어쩔 수 없이 몇 번 고개를 끄덕이자, 주군의 분위기를 살피던 엔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문제없이 일이 마무리되면...”
“응?”
달라진 엔쥬의 어조에 소마가 고개를 들었다. 서류 뭉치를 가져와 책상에 턱 니 올려놓던 스이센 사무소의 팀장은 어디로 갔는지, 안경을 쓴 사내의 얼굴에는 수줍은 기색이 옅게 드러났다.
“원하시는 것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소마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내가 원하는 거?”
“예.”
소마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것을 눈치 챈 엔쥬가 다급하게 ‘한 가지를 들어드리겠다는 뜻입니다.’ 라고 덧붙였다.
“쩨쩨하네. 어쨌든 들어준다는 거지?”
“...예.”
“흐음...”
가늘어진 시선이 노골적으로 엔쥬의 몸을 훑었다. 엔쥬는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서류철로 상반신을 가렸다. 벌써 불길한 예감이 느껴지지만 이미 한 말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진짜지? 뭐든?”
5분 전만 해도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즐거움이 묻어났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반면 엔쥬는 달라진 소마의 기세에 자신감이 떨어졌다. 뭘 시키려고 저러시지? 성적으로 음란한 일을 시키시려고 그러나? 아키하바라 건 이후로 이상한 방향으로 성 지식을 얻으셔서 조금 걱정되는데... 과연 내가 들어드릴 수 있을까?! 온갖 걱정 때문에 엔쥬의 심리가 위축되었다.
그러나 소마의 자세가 달라지고, 나름대로 집중해 보려는 모습에 엔쥬는 말을 더 얹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업무를 소마가 엔쥬에게 물어보길 몇 차례, 두 사람은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퇴근할 수 있었다.
하루, 또 하루, 비슷한 시간이 지나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서류 업무가 모두 정리되었다.
서류를 제출하고 문제가 없음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이번 분기는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스이센 사무소는 야끼니쿠 집에 모여 조촐하게 자축 겸 회식을 즐기고, 다음 날은 직원 모두 휴식을 갖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나나세가 엔쥬에게 얼굴이 어둡다며 체하셨냐고 묻는 작은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문제는 없었다.
소마와 엔쥬와 스이센, 나나세와 무라사키는 귀가하는 방향이 달라 두 갈래로 나뉘어 헤어졌다. 귀가하는 직원들의 뒤통수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소마가 배가 불러 꾸벅꾸벅 조는 스이센을 업었다.
“오늘은 어디서 잘 거야?”
오늘은 자신의 집에서 돌아가 휴식을 취할까 한다는 착실한 답변이 돌아왔다. 소마는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걸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갈림길이 나왔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꾸벅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엔쥬의 등 뒤로 깜빡했다는 듯 목소리가 날아왔다.
“괜찮으면 내일 점심 같이 먹자. 시내 구경도 하고.”
이른바 데이트 신청이었다. 엔쥬가 무어라 답하기 전에 소마가 씨익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일이 잘 끝나면 뭐든 하나 들어준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내일 써도 되지?”
소마의 얼굴에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묻어났다.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자신의 입으로 들어드리겠다고 말한 거지만... 이대로 그렇다고 해도 되는지 잠시 갈등하던 엔쥬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소마가 아까보다 밝아진 낯으로 주먹을 쥐었다. 엔쥬는 어쩐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물었다.
“무엇을 시키시려고 그러십니까?”
“궁금해?”
“예에...”
색이 다른 눈동자가 엔쥬를 응시하다가 휘어졌다. 명백히 뭔가 꾸미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와 달리 소마의 어조는 가벼웠다.
“대단한 거 시키려는 건 아니고.”
“다, 다행입니다만...”
“내일 하루 동안 ‘안된다’는 말은 하지 않기. 어때? 괜찮지?”
‘안 됩니다’를 하루 동안 말하지 않을 것. 엔쥬는 소마가 내건 조건을 곱씹으며 어려울 것 없겠다는 생각했다. 거절에 ‘안된다’는 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가 있지 않은가? 또 평소에 소마가 무리한 일을 요구하거나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니...
“그 정도는 쉽게 들어드릴 수...”
“참고로 곤란하다거나 사양하겠다거나 빙빙 돌아 거절하는 그런 말들도 금지야.”
“....예?”
“흐흐. 이참에 네가 싫다고 한사코 사양하던 걸 시켜볼까...”
“예에?”
서서히 식은땀이 차오르는 참모를 내버려두고, 소마가 산뜻하게 돌아서며 손을 흔들었다.
“푹 쉬어.”
왠지 뒷말에 ‘내일 고생할 테니까.’ 라는 뜻이 생략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엔쥬는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멀어지는 주군과 잠든 스이센의 뒤통수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소마가 시선을 느끼고 돌아와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며 조건을 고쳐주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엔쥬는 늘어지는 걸음걸이로 자신의 집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설마, 소마 님이 파렴치한 짓을 강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스스로 다독였지만 내일 떠오를 태양이 조금 두려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