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회 시즌은 언제나 정신 없었다. 사냥대회, 살롱, 무도회...... 처음에나 초대장을 받고 일일히 내용을 확인했지, 나중에는 가까운 사람들이 보냈거나 중요 순위가 높은 초대장만 그녀가 열었다. 지금 막 그녀가 봉랍을 벗겨내는 초대장 역시 그랬다. 애셜 가의 문양이 화려하게 새겨진 봉랍, 딱 봐도 고급스러운 편지지와 그 위를 수놓는 문장들. 드높은 중앙의 본성이 영애와 영식들을 위해 성문을 개방할 모양이었다. 베아트리체는 참석할 수 있어 영광이라는 문장을 느리게 써내려갔다. 반가운 얼굴들을 곧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마차에서 내리자 황금색으로 타오르듯 빛나는 본성이 보였다. 10살 무렵, 저 안에 들어가 잊지 못할 사건을 겪었건만. 그럼에도 빛을 내뿜는 왕궁은 숨막힐 정도로 찬란했다. 대낮인데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베아트리체는 잠시 서서 그 모습을 응시했다.
그리고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리체!"
익숙한 목소리였다. 여러 생각이 순식간에 썰물처럼 밀려나갔다.
"티냐, 놀랐잖아요."
어깨를 감싼 팔을 톡톡 치며 말하자 장난끼 넘치는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여러 번 울렸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리체가 보이길래 그만! 그것보다 오늘 입은 드레스 정말 잘 어울린다! 아주 예뻐."
팔이 풀리고 베아트리체는 곧 티아나와 마주할 수 있었다. 금색 실로 포인트를 준 화려한 연미복에 타이에 고정된 붉은 보석 브로치까지, 눈이 즐겁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금발을 멋들어지게 모아 묶은 티아나는 그야말로 높은 가문의 영식이 따로 없었다. 오늘 무도회에서 술에 취한 척 티아나 앞에서 비틀거릴 영애들이 꽤나 많을 것이다.
"기뻐라. 티냐도 근사해보여요. 영애들이 감탄하다 못해 쓰러지겠는걸요?"
"리체는 안 쓰러져?"
"저마저 쓰러트리려고 하시다니 욕심쟁이시네요. 들어갈까요?"
"그러시지요. 공주님."
티아나가 절도있게 팔을 내밀었다. 리체는 부드럽게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두 사람의 입장을 알리는 왕궁수행원의 목소리가 댄스홀까지 울려퍼졌다. 곧 영애와 영식이 몰려들었다. 입 아프도록 인사를 주고 받는데, 티아나와 베아트리체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빛무리가 춤을 추듯 햇빛을 반사해내는 샹들리에 아래,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미남이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그의 입가에는 흐릿한 미소의 흔적이 읽혔다. 권태로움과 희미한 짜증의 흔적이었다. 그의 주위에 서 있는 영애와 영식들이 쉽게 다가가지는 못하고 소곤거리며 헬레니아의 도련님에 대한 감상을 나눴다.
"어, 키르잖아!"
티냐가 단박에 사람을 물리치더니 태풍의 눈으로 걸어갔다.
"늦었잖아."
키르케 헬레니아가 선명하게 미소를 그렸다. 꽃이 개화하듯 아름다운 미소였다. 티아나의 격한 인사에 맞춰 키르케 역시 그녀를 포옹했다.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주변에서 부러움과 흠모가 뒤섞인 감탄사를 내뱉었다.
"키르, 많이 기다린 건 아니죠?"
둘에게 다가가며 베아트리체가 말을 건네자 키르케의 고개가 돌아갔다.
"많이 기다렸다고 하면 미안해할 거야?"
"어머, 그건 생각해볼게요."
우리도 많이 늦은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덧붙이면서 베아트리체는 '잠시' 혼자 있었을 키르케의 시간을 생각했다. 넓은 공간에서도 한 눈에 찾을 수 있는 사람이니 오죽했을까.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광적이었다. 키르케 헬레니아가 착용한 옷부터 잠시 입가를 닦은 냅킨까지 손에 넣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의 줄을 세우면 댄스홀을 넘어 루엔야크의 광대한 산맥까지 이어질 것이었다. 사교계 시즌에 유독 권태로움을 드러내는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베아트리체는 그들을 향한 시선 사이 사이를 살폈다. 아직 체이스는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오지 않은 루엔야크의 후계자에 대해 묻자, 키르케는 그녀에게 쿠키를 물려준 후 짓궂게 웃었다. "그 녀석 혼자 입장하면 재밌단 말이야." 누가와 견과류가 바삭하게 씹히는 과자를 맛보며 리체도 동감할 수 밖에 없었다.
곧 연회장의 문이 열리고 루엔야크의 후계자가 도착했다는 우렁찬 알림이 들렸다. 베아트리체, 키르케, 티아나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강철처럼 단단한 표정을 한 체이스 루엔야크가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잠시 서 있다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데다가 체격도 남다른 그가 영애와 영식 사이를 헤치자 그야말로 물과 기름이 따로 없었다. 키르케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체이스는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정작 본인은 눈에 띄고 싶지 않아 하니 희극이 따로 없었다.
"늦어서 미안."
그들 앞에 선 체이스는 순한 양처럼 웃었다. 앞서 온 세 명의 후계자는 늦게 도착한 후계자를 신나게 놀려먹은 후 댄스 홀로 나섰다.
이제 춤을 출 시간이었다.
"춤이 많이 늘었네요, 체스."
베아트리체는 진심으로 놀랐다. 체이스의 몸놀림은 유연했다. 춤을 청하는 동작이나, 턴을 할 때 허리를 당기는 손짓에서 긴장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굉장한 성과였다.
"너희랑 매번 한 곡씩 추니까... 연습은 해둬야 할 것 같아서."
겸연쩍게 말하면서도 그녀를 이끄는 발놀림이 꽤 가벼웠다. 그 말대로 연습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을 변화였다.
"리체 선생님은 정말 기쁘네요. 제자가 이렇게나 성장하다니. 키르 선생님도 티냐 선생님도 박수쳐주실 거랍니다."
"놀리지 마..."
후후. 즐겁게 미소 지으며 베아트리체는 체이스의 손을 잡은 채 빙글 돌았다.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앗, 저기 메지나 영애 있다."
"!"
체이스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안타깝게도 루엔야크의 후계자께서는 산짐승보다 영애를 더 꺼려했다. 정확히는 '체이스 님과 춤만 출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아!' 같은 말을 서슴치 않는 영애들을. 어쩔 때는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영애들에게 쫓기다 못해 마치 후퇴하는 사냥꾼처럼 두꺼운 커튼의 그림자 사이로 몸을 숨기던 모습을 본 후부터, 이따금 베아트리체는 그를 이렇게 놀리기를 즐겼다.
"거짓말이에요."
"놀리지 말라니까..."
"체스 반응이 재밌는 탓이에요."
내 탓인가? 눈을 내리뜨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에 더 골려줄까 하던 그 때, 선율이 바뀌었다. 파트너가 바뀔 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맞잡은 손이 풀렸다.
"체스! 이번에는 나랑 추자~"
금발의 왕자님이 루엔야크의 후계자를 위해 마중을 나왔다. 자연스럽게 키르케가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어머나, 아름다우신 분. 영예로워라."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허리를 받친 키르케의 손에 몸을 맡기자 키르케가 어색해했다. 조금 민망해하는 것도 같았다. 자신이 아름답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가까운 친구들이 진심으로 말하면 어색해하다니. 재밌는 점이 아닐 수 없었다.
"가문의 명예가 아닐 수가......"
"알았으니까 그만."
"정말 안 거 맞아요?"
키르케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딨겠어?" 오만하지만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여상한 목소리였다. 현악기의 선율이 점점 빨라졌다. 두 사람은 어렵지 않게 속도를 맞추었다.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 부드럽게 공기 중에 펼쳐졌다가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드레스 잘 어울려."
"키르케가 추천해준 색을 써 봤어요. 헬레니아의 공자님을 믿기 잘했죠."
"내 안목을 신용해주다니 기쁜데. 금색 실로 자수를 놓은 건 누구 생각이야?"
베아트리체는 조용히 미소짓기만 했다. 턴을 돌며 갈색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어졌다. 발놀림이 교차되었고, 키르케의 시선은 멀지 않은 곳에서 깔깔거리며 체이스와 함께 춤추고 있는 티아나에게 닿았다. 정확히는 연미복의 소매를 장식하는 파도 자수를. 티냐는 곧잘 그런 의복을 입고 왔다. 라이즈벨의 의상실에서 유행하는 자수인듯 했다. 그리고... 금색 실은 이카르드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색의 실이었다.
"아하."
다 알았다는 듯 키르케가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해요."
"정말 가까운 곳에서 영감을 얻었네."
"조용히 하라니까요."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시인한 셈이 된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베아트리체는 키르케의 입을 막았다.
"좋아. 베아트리체 양께서 제 입을 막으셔야겠다면 그래야지요. 당연히."
"원하는 걸 말해요."
"친구한테 뭘 원하겠어?"
키르케는 좋은 친구였다. 리체가 부탁하면 절대 말하지 않을 그였다. 짓궂게 놀리기는 하겠지만. 그리고 그가 티아나에게 베아트리체의 드레스 자수가 어디서 영감을 받은 것이고, 왜 그것을 티냐 본인에게만 말을 안했는지를 알려주어도 상관은 없었다. 티냐는 "응? 리체가 내 옷이 마음에 들었나보네!" 하고 말 게 분명하니까.
"티냐가 다른 사람들 데리고 와서 인사시키는 거 잘 말해서 그만두게 할게요."
그래도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것이었다. 그럴 필요 없는데도 베아트리체는 협상안을 제시했다.
"그럼 고맙지. 잘 부탁해."
좋은 친구인 동시에 베아트리체와 마찬가지로 협상가였던 키르케는 단박에 받아들였다.
마치 꽃이 피어나듯 화려한 본성의 연회장 안에서, 작은 협상이 빠르게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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