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어느 날. 싸늘한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었다. 니키타 예레미아는 따스한 오렌지색 불빛이 감도는 서재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반쯤 풀린 손가락 끝에는 깃펜이 아슬아슬하게 걸린 채였다. 그녀의 앞에는 서류가 어지럽게 흐트러졌는데, 몇몇 사람의 간단한 인적사항과 방문 날짜 등이 기입되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평화로워보였다.
“저 왔어요오오!”
발랄하게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불청객만 아니었다면.
니키타는 문 젖히는 소리에 놀라 퍼뜩 눈을 떴다. 손가락 사이에 간당간당 자리잡던 깃펜이 휙 돌아가 잉크병을 건들었다. 짙은 검정색 액체가 서류에 쏟아지고 니키타의 옷에 점점이 튀었다.
“으악! 뭐야! 뭐야!”
잠에서 덜 깨 허둥대고 있자 불청객이 한심하다는 기색으로 지팡이를 휘둘렀다. 더러운 잉크 자국이 싹 사라졌다.
“뭐야! 뭐……”
“니키타야앙. 정신 차려요오.”
루나리아였다. 니키타는 멍청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제발 노크 좀 하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뭔 일이야…… 놀랐잖아!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네.”
“과장도 차암. 창문이나 보라구요오.”
예쁘게 잘 정돈된 손톱이 니키타의 등 뒤를 가리켰다. 어두운 밤 하늘 아래 눈송이가 하늘하늘 떨어졌다.
“눈이네.”
간단하게 일축하자 루나리아가 핀잔을 주었다.
“첫눈이라구요오! 로맨틱하지 않나요?! 그쵸?”
“알게 뭐야……”
“이 첫눈을 사나구우군과 함께 봤답니다. 첫눈을 같이 본 상대와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겠죠?”
녹색 눈동자가 보석이라도 박아넣은 것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루나는 예언을 우습게 보는 주제에 사랑과 관련한 것이라면 미신이든 뭐든 사족을 못썼다. 니키타는 말을 덧붙이는 대신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눈이라. 호그와트 다닐 때에도 지금도 그녀에게 첫눈은 날이 본격적으로 추워진다는 알림에 지나지 않았다. 호그와트는 좋은 하교일지 몰라도 겨울 학기를 보내기에 좋은 곳은 아니었다. 그 사무치는 추위하며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미친 듯이 쌓이는 눈은 그녀의 천적이었다. 애들은 좋다고 나가서 눈싸움을 하고, 어어하다가 거기에 끌려들어가서 실컷 눈을 맞고 벌벌 떨며 기숙사로 들어가던게 엊그제였는데……
“회상이 너무 긴 거 아녜요오?”
“내가 무슨 생각하는 지 어떻게 알아.”
“어딘가 뭔 곳을 바라보면서 몸을 떨잖아요오. 시시한 생각 하지 말고 내 얘기나 들으라구요오!”
니키타는 팔짱을 꼈다. 청자로서는 불성실한 자세였지만 루나는 개의치 않고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사나군이랑 크리스마스 파티하기로 했어요오.”
“그거 참 안됐…… 엥? 파티?”
“네! 사나군 카페에서 파티 할거라구요! 니키타양도 참석해야 하는게 흠이긴 하지만. 뭐 어때요오. 사랑하는 사람과 파티라니. 벌써부터 너무 기대되네요오~ 옷은 뭘 입지? 헤어스타일은 어떻게 할까?”
루나리아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춤추듯 발을 놀렸다. 윤기 흐르는 고급 소재의 검은 드레스가 나풀나풀 흔들렸다. 니키타는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파티 때는 꼭 사나군과 춤 출거예요오.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에 두 사람이 춤을 춘다니 생각만 해도 근사하지 않나요오?”
자기 멋대로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린다고 상정까지 하고 있다. 니키타는 루나가 펼치는 핑크빛 로맨스를 다 듣지 못하고 끊어버렸다.
“아니 내가 왜 참석해?”
“사나구운이 니키타가 빠지면 섭섭해할거라고 그러던걸요오~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마음 써주는데, 오지 말라고 막으면 사나군이 절 어떻게 생각하겠어요오.”
아니 이 자식이 지 맘대로 날 끌어들여? 니키타는 사람 좋게 웃으며 손짓하는 남자의 얼굴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이 나쁜 자식!
“나 전혀 섭섭하지 않아. 내가 어? 눈치 없이… 끼어들어서 뭣하겠어…”
그녀와 사나와 루나리아가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저녁이라니 생각만 해도 속이 얹혔다. 어떤 음식도 편하게 넘어가지 않을 게 뻔했다. 억지로 웃으며 손사래를 치자 루나가 오히려 손을 절래절래 흔들었다.
“니키타야앙도 혼자서 쓸쓸하게 보내는 것보단 친한 사람들끼리 보내는 게 좋잖아요오?”
“왜 내가 혼자서 보낼 거라고 확신해. 내가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겠어?”
“보낼 거잖아요오. 사귀는 사람도 없죠오? 불쌍하게도.”
손을 모은 채 측은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루나리아의 시선에 니키타는 뒷목이 당겼다. 누가 누굴 동정하는 거야!
“나 정말 괜찮아. 진짜. 정말로. 하늘에 맹세코.”
“사나구운이 세 명이서 보내면 정~말 좋을 거라고 했단 말이예요오. 친구들이랑 오붓하게 크리스마스 보내는 게 소원이라고. 니키타가 빠지면…… 안되겠죠?”
공 들여서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모의 마녀가 생긋 웃었다. 의견을 물어보는 미소가 아니었다. 무조건 참석하라는 압력이 가늘어지는 눈매에서 느껴졌다. 니키타는 그만 기가 꺾여버렸다. 호그와트 때에 비하면야 루나리아 루크레티아와 편한 관계였지만 이럴 때는 달랐다.
“알았어. 참석하면 되잖아.”
“신난다아! 같이 쇼핑하러 가줄거죠?”
고행길이 눈 앞에 보였다. 니키타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나 이 자식 두고 보자. 통한의 한 마디는 소리 내지 못하고 묻혔다. 오늘따라 ‘친절하고 착하지만 이상하게 운이 나쁜 카페 사장’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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