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4일. 누군가의 생일 아니랄까 봐 먹구름이 런던 시내를 뒤덮다시피 했다. 햇살이 쏟아져야 하는 아침인데도 이른 저녁 시간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어둡다. 비가 쏟아질까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조바심 없이 느긋하기만 한 여자가 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혀를 찬 붉은 머리의 여자는 익숙한 벽돌길을 걸었다. 어쩌다 엉겁결에 떠맡은 가게가 예상보다 훨씬 잘 된 덕분에, 외국 출장까지 갔다 온 그녀의 손에는 디저트 쪽으로 호평 일색인 유명 가게의 케이크 상자가 들려있다.
부츠의 끝은 북 카페 앞에서 멈추었다. 크고 작은 사고 다발 지역에 위치한 카페인데도 좀처럼 보기 드물고 질 좋은 책 때문인지 커피의 향 때문인지 항상 손님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손잡이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에 걸린 방울이 울리고, 주방 청소 중이었는지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손을 닦으며 계산대 앞으로 나왔다.
“니타?”
오랜만에 가게를 찾은 단골 손님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상자를 들어 보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출장 가는 동안 카페는 별일 없었고?”
“그렇지 뭐.”
사나가 내온 아메리카노를 당연하게 받아든 니키타는, 카페 점장의 ‘별일 없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도 사나의 불운은 여전했다. 사나가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잠재적 무장강도들이 자기가 카페를 먼저 털겠다고 신경전을 펼치느라 영업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뭔가 일이 많이 일어났지만 카페 문 닫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나보다, 정도로 추측하며 니키타는 상자를 내밀었다.
“선물. 이거 먹겠다고 사람들이 줄지어서 기다리더라.”
사나가 고마움을 표하며 상자를 풀었다. 종이 상자가 열리자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설탕 향이 나풀나풀 허공을 날아다녔다. 작고 세밀한 파티쉐의 손길이 느껴지는 화려한 디저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제품이구나. 나도 못 먹어 본건데.”
“그렇다더라고.”
니키타는 ‘이번에 신작이 어쩌고’ ‘파티셰가 악마의 혼을 팔아서 어쩌고’ 하며 옹기종기 줄 서서 가게 안으로 들어가길 기다리던 인파들에 식겁했었다. 물론 그녀는 줄을 서지 않았다. 어찌저찌 하다보니 거의 반칙 같은 방법으로 유명 파티셰의 신작 디저트 두 상자를 구매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불운한 사나가 써먹기에는 어려운 방법이므로 그녀는 입수한 경로에 대해서는 입 다물기로 했다.
카페 디저트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겠다며 좋아하던 카페 점장은 포크 두 개를 가지고 왔다. 둘은 한적한 카페에서 설탕 덩어리를 나눠먹었다. 입 안이 들쩍지근하게 달라붙는 감각에 니키타가 아메리카노를 쭉 빨아들였다.
“출장은 어땠어?”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다 대답했다.
“순수혈통들 재수 없더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나는 대충 짐작이 되었다. 그는 상냥하게 웃어넘겼다. 한숨을 쉬며 빨대를 자근자근 씹던 니키타가 문득 품을 뒤져서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뭐야?”
“아버지가 너 주래. 생일 축하한다고.”
양피지로 여러 겹 감싸인 꾸러미를 풀자 고서가 나왔다. 짐승의 가죽에 염색해 만든 표지로, 제목은 쓰이지 않았다. 그의 손이 표지를 느리게 훑었다. 손바닥 사이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너 정도라면 이 책의 가치를 알 수 있을 거래. 참, 생일이면 가볍게 축하해주시지.”
“아냐. 답례 편지 써야겠네……”
책을 만지작거리는 사나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새로운 지식의 탐구에 설레는 모습이 딱 래번클로 졸업자다웠다. 니키타는 질색하며 래번클로에게 손을 내밀라고 손짓했다. 사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자. 이건 내 선물.”
조그맣고 광택이 흐르는 불가사리가 툭 떨어졌다. 어딘가의 기념품점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모형이었다.
“일회용 포트키야. 부수면 하와이로 갈 수 있어.”
“그렇구나.”
“방금 고작 가짜 불가사리를 선물로 주다니…… 라고 생각했지?”
“아니 아니, 전혀.”
“얼른 고맙다고 해.”
“고마워, 니키타.”
진심이 안 느껴진다는 니키타에게 고맙다는 말 세 번을 한 끝에야 선물 증정이 끝났다. 그녀는 엎드려서 절 받기 세 번을 한 후, 만족스럽게 웃으며 생일 축하한다며 사나의 입에 사탕을 던져 넣었다.
물론 후추 사탕이었다.
4월 24일의 우중충한 아침이 물러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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