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미] 하츠모데

etc 2025. 1. 12. 22:20

 

 

해가 바뀌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돌아오는 주말 아침. 텔레비전에서 정월 초하루와 관련한 뉴스가 나왔다. 카나타가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나물 반찬을 우물거리는 동안, 오전 운동에 샤워까지 마치고 돌아온 미카미 역시 자리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할 준비를 했다. 시선은 텔레비전에 둔 채였다.

 

-새해를 맞이해 신사를 찾는 사람들이 예년보다 많을 것으로 예상...

 

아나운서의 명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졸린 데다가 허둥지둥 아침 식사를 준비한 터라 카나타는 뉴스에는 영 집중하지 못하고 미소시루를 먹는 일에 바닥난 기력을 쏟고 있었다.

 

“우리도 갈까?”

 

깨작깨작 두부를 건지던 수저가 멈추었다.

 

“어디를...”

 

잠긴 목소리에 미카미가 화답하듯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어디긴. 하츠모데 겸 신사에 방문할까 싶어서.”

 

‘하츠모데’. 새해가 시작된 후 정월에 신사나 절에 방문하여 무탈한 한 해를 기원하는 행위였다. 카나타는 하품하며 평소 미카미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의외라는 감상이 뒤를 이었다.

 

“당신도 이런 이벤트는 챙기는구나.”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건 아니고. 하츠모데...”

 

카나타는 가족이 있었던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신년 맞이 겸 참배를 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하츠모데와 함께 연상되는 단어와 기억이라고 해봤자 사람이 바글거리던 신사와 평상시에 입지 않아 어색하고 불편한 전통 옷, 그리고 인파, 인파, 인파밖에 없었다.

 

“사람 많을 거 같은데...”

 

자연스럽게 소극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동시에 미카미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미카미는 그저 젓가락을 놀리며 입을 열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

“?”

 

 

아침의 공기가 차갑다.

 

바람이 불자 카나타는 패딩 소매 속으로 주먹을 쥐며 팔짱을 끼었다. 하오리 위에 두꺼운 겨울 점퍼를 입었는데도 추운 날씨다. 하오리만 입었으면 피부가 꽁꽁 얼고도 남을 기온이었다. 그런데...

 

카나타는 불가사의한 것을 맞닥뜨린 탐사자처럼 앞서나가는 중인 일행을 응시했다. 신사에 가보자고 권한 동거인이 여유롭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정적인 패턴의 하오리에 옅은 색의 하카마가 보폭에 맞추어 흔들렸다. 거기에 발목 위까지 오는 방한용 신발에 어깨에는 모피처럼 보이는 회색의 망토를 걸쳤다. 그야말로 그림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의 차림새는 겨울의 싸늘한 추위를 막아주기엔 역부족이었다.

 

“당신 진짜 안 추워?”

“음?”

 

미카미가 뒤를 돌아보았다. 타이밍 맞게 바람이 불어 하오리가 흔들렸다.

 

“난 괜찮아. 그보다 카나타 군, 패딩 입었는데 추워? 이거 줄까?”

 

오히려 망토를 벗어주려고 해서 카나타가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미카미와 비슷한 의상을 입긴 했어도 패딩에 목도리, 털장갑까지 중무장한 카나타보다 비교적 가벼운 차림인 미카미가 추위에 강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기계화된 반신 덕분일까? 체온 조절을 자동적으로 해주는 기능을 넣은 것이 카나타 자신이었지만 당장 추운 날에 가벼운 차림으로 패딩 없이 다니는 미카미를 보고 있자니 믿기지 않았다.

 

딴생각을 하는 중이었지만 일행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겨우겨우 계단을 오르자 앞으로는 토리이를 사이에 두고 신사로 향하는 길이, 뒤로는 멀어진 도시의 정경이 보였다. 예년보다 방문객이 많을 거라는 아나운서의 말과 달리 카나타와 미카미를 제외한 사람은 없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지?”

 

토리이 근처에 서 있던 미카미가 미소 지었다. 카나타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일행을 흘겨보았다.

 

“그야 그렇겠지...”

 

어느새 스마트폰을 쥔 카나타가 화면을 확인하더니 외쳤다.

 

“...새벽 6시에 계단이 많기로 소문난 신사에 올 방문객은 없으니까!”

 

스마트폰 화면에 뜬 시각은 6:11 AM이었다.

 

“사람에 치이는 건 싫다고 했잖아. 실제로 쾌적하지?”

 

뭐가 문제냐는 듯 여유로운 상대방의 모습이 얄미웠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에 올 줄 몰랐어. 거리상으로 더 가까운 신사도 있었잖아!”

“거긴 유명한 곳이라 새벽에도 사람이 많거든. 설마 계단 오르는 게 힘들었어?”

 

시노비잖아? 미카미가 덧붙이는 말에 카나타가 이를 갈았다. 그러던 말던 미카미는 신년이니 운동 계획을 세워보는 건 어떻겠냐며 자연스럽게 카나타의 어깨를 감싸며 걸었다. 카나타는 투덜거리면서도 저도 모르게 오래된 신사가 자리 잡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토리이에 이어 작은 매점을 지나치자 보이는 것은 신사였다. 산을 뒤에 둔 본전과 배전은 조촐한 크기였다. 둘 다 나무로 지어져 해묵은 티가 났지만 일반인들이 기도를 올리는 배전 역할의 건물과 새전함은 계속 관리가 되었는지 깨끗했다.

 

사람이 없는 덕분에 두 사람은 곧바로 배전의 앞에 섰다.

 

“기도하는 방법은 알고 있니?”

“대략적으로만.”

“그렇구나. 그러면...”

 

미카미가 기도를 하는 요령을 알려주었다. 약간 귀찮은 절차가 있지만 1분도 안 되어 끝날 간단한 방식이었다.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부정 타려나.”

 

괜히 엇나가는 말을 해보았지만 미카미는 별다른 반응 없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어떨까. 시험해 보는 건 어때.”

“...그냥 해본 말이야!”

 

몇 마디 대화가 끝난 후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배전과 마주 보았다. 침묵 속에서 박수 소리가 두어 번 울렸다. 손바닥을 모은 채 카나타는 내년에도 미카미와 하츠모데를 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짧은 기원은 인사와 함께 끝났다.

 

“그럼 다시 내려갈까?”

 

조용히 손을 모은 채 무언가를 기원하던 모습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어느새 미카미는 카나타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자. 맞다. 내려가기 전에 오미쿠지 뽑아볼래.”

“오미쿠지?”

 

카나타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사무실 사람들이 뽑았다길래 생각난 거야! 신사 들린 김에 해보면 좋잖아.”

 

놀림 받기 전에 선수 친 거였지만, 오히려 덧붙인 말에 미카미가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우... 웃지 마!”

 

미카미의 웃음은 매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추워서 얼어붙은 뺨이 약이 오른 탓에 달아올라 터지기 직전, 검은색 장갑을 낀 손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받아 든 것은 나무로 만든 원통형의 물건이었다.

 

“오미쿠지 하고 싶다면서.”

“...”

 

오미쿠지의 번호를 뽑는 제비뽑기 통이였다. 카나타가 열받아하는 동안 이미 매점에서 결제까지 마친 모양이었다.

 

이미 제비뽑기 통을 받았고, 매점을 지키는 관리인이 지켜보고 있어 무어라 짜증 내기도 민망했다. 카나타는 민망함을 풀 기세로 제비뽑기 통을 흔들었다. 안에서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지다가, 길쭉한 나무 막대기가 하나 빠져나왔다. 막대기 끄트머리에 번호가 쓰여져 있는 걸로 보아 관리인이 번호를 확인하고 해당하는 운세를 주는 형식인 듯했다.

 

“이걸로 주세...”

 

매점에 반납하려는 카나타의 움직임을 막고 미카미가 통을 가져갔다.

 

“당신도 오미쿠지 하려고?”

“신사에 들린 김에 해보면 좋잖아.”

 

자신이 변명처럼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았다. 카나타가 도끼눈을 뜬 채 흘겨보는 동안, 미카미는 가벼운 동작으로 제비를 뽑았다. 이윽고 나무막대기 두 개와 제비뽑기 통이 매점에 반납되었다. 매점을 보던 나이가 지긋한 관리인이 곧 길쭉한 세로 봉투를 두 개 가져왔다. 갈색 봉투 위에 번호가 쓰여 있어 주인을 헷갈릴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오미쿠지 종이를 묶어놓는 횃대 앞에서 내용을 확인하기로 했다. 미카미가 봉투에서 얇은 종이를 꺼내는 동안, 카나타 역시 자신의 몫으로 받은 오미쿠지를 개봉했다. 결과는...

 

...닭이 봉황을 따라 하늘을 난다.

...직접 배를 저어 강을 건널 것이다.

 

대길이었다. 고어 아래로 여러 항목과 관련한 조언이 줄지어 이어져 있었다. 아픈 환자는 완치하고, 쟁사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등 읽기 좋은 글들뿐이었다. 미신이긴 해도 새해를 시작하는 한 걸음이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카나타 군. 뭐가 나왔어?”

“대길. 당신은?”

“부러운걸.”

 

읽는 게 빠르다는 듯 미카미가 얇은 종이를 건네주었다. 카나타는 그의 운세를 남김없이 읽었다. 대문짝만하게 찍힌 ‘소길’을 시작으로 고어와 각종 조언이 뒤를 이었으나...

 

“미묘하게 안 좋은 운세네.”

 

길에 해당하는 내용이긴 하나 미카미의 운세는 ‘공무원일 경우’ 좋은 운이 트인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쟁사에 있어선 상급자의 말에 따르라는 조언이 이어졌다. 미카미와 카나타의 상황을 생각해 봤을 때 그다지 좋은 내용이 아니었다.

 

“오미쿠지 바꿀래?”

 

장난스러운 말투에 카나타 역시 가볍게 응수했다.

 

“대길과 소길인데? 소길보다 더 좋은 걸 주면 생각은 해볼게.”

“흐음. 그렇구나... 뭐가 좋을까.”

 

잠시 생각하는 척을 하던 미카미가 기습적으로 카나타를 끌어당겼다.

 

“뭐...”

 

카나타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입술에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당황한 나머지 카나타가 말을 잇지 못했다.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차갑게 식은 볼에 입맞춤이 이어졌다. 장난기가 섞인 애정 표현이 끝나기 무섭게 카나타가 말을 더듬었다.

 

“뭐, 뭐, 뭐, 뭐....”

“이런. 놀랐어?”

 

밖에서 입을 맞춰놓고도 여유로운 태도에 카나타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바, 바, 밖이잖아! 당연히 놀라지!! 사, 사람이...”

 

카나타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방문객은 없었다.

 

“한산한 곳이야. 하지만 카나타 군이 계속 소리 지르면 관리인이 놀라서 나올지도 모르겠네.”

“으으으윽...!”

 

큰 소리로 어째서 밖에서 뽀뽀를 한 거냐고 따졌다간 미카미가 말한 대로 관리인이 달려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옷 안에 깃털이라도 들어갔는지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어 도저히 진정하기 어려웠다. 심호흡을 하던 와중에 미카미의 표정을 확인한 카나타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웃지 말라니까!!”

 

얼굴이 붉어진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반응이 재미있는지 미카미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후, 흥분을 가라앉힌 카나타가 미카미의 소맷자락에 오미쿠지를 넣었으나 다시 돌려받았다. ‘오미쿠지를 바꾸기 위한 대가’가 아니었냐는 말에 장난이었다는 응수가 돌아오자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진 건 덤이었다.

 

태양이 고개를 들자 차갑던 새벽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마치 따뜻한 볕이 들기를 기다렸다는 듯 한산하던 신사를 찾는 방문객이 늘기 시작했다.

 

하츠모데를 마치고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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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밀M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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